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가키 가즈시게 (문단 편집) === 재임기와 이후 영향 === 여튼 우가키는 이렇게 5년간 조선을 다스리고, [[1936년]]의 [[2.26 사건]]을 계기로 자신이 정계에 나설 때라고 생각하고 총독에서 물러난다. 하지만 이 양반이 물러나고서 나타난 후임 총독이 [[미나미 지로]]다. 가히 [[헬게이트]]가 열렸다. 물론 단순히 성장률만 따져서는 미나미 지로 때의 조선 경제도 만만치 않았다만 이런 시기는 [[식민지 근대화론]]의 좋은 떡밥이 되는 시기로써, 경제 성장률만으로 모든걸 설명할 수는 없다. 게다가 이 시기는 그 유명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졌다. 우가키 총독 초기에는 [[세계 대공황]]의 여파가 남아있어 '''보통학교 이상을 졸업한 졸업생 75%가 취업을 못했다.''' 이때 상륙해 큰 인기를 끈 [[독일어]] 단어가 그 유명한 [[룸펜]]. [[이상]]의 《[[날개]]》나 [[채만식]]의 《[[레디메이드 인생]]》이 이 시기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. || [[파일:Kazushige_Ugaki_with_signature.jpg|width=350]] || || [[1938년]]의 모습[* 하얗게 세어 버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콧수염이 있다.] || 사족으로, 우가키의 사위 야노는 몽양 [[여운형]] 선생을 보고 홀딱 반했다고 전해진다. 여자였다면 몽양 선생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했을 텐데, 남자로 태어나서 그러지 못했다고. 우가키 본인도 여운형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을 표했다. [[1937년]] [[중일전쟁]]이 발생하자 외무대신에 임명되어 장제스와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[[고노에 후미마로]]의 지원을 받아 1938년 우가키 공작이라는 것을 지휘했지만 군부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말아먹었고 열받은 우가키는 외무대신직을 버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